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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여러가지 사실들

박정희에 대한 여러가지 사실들

by 장봉다리 2022.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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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 박정희

 

1. 박정희 요약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아버지인 박성빈, 어머니 백남의 사이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스무살인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였고, 1940년 교사를 사직하고 만주국 육군 군관학교에 입교했으며,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 후 졸업한 뒤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 육군 장교로 근무했다. 대한민국이 8.15 광복이 되면서 한국광복군에 편입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 1946년 귀국하여 조선 국방경비 사관학교 단기과정을 마친 뒤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대구에서 일어난 10.1사건에서 사회주의 성향을 갖고 있던 독립운동가이자 셋째형인 박상희가 경찰에게 사살당하여 사망하였고 그 사건 때문에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지만 1948년 김창룡이 주도한 군내 좌익분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여수/순천 10.19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돼 1심 재판에서 불명예 전역 및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백선엽에 의해 구제되었고 1950년 6.25 전쟁으로 다시 재임관했다.

 

1961년에는 김종필 등과 함께 5.16 군사정변을 주도했으며, 제2공화국을 전복한 뒤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수립. 육군 대장으로 전역 이후 1963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윤보선을 제치고 당선되어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 되었고, 1969년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킨 후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를 제치고 다시 한번 대통령이 되었고 1972년에는 대통령에게 엄청난 권력을 부여하는 10월 유신을 선포해 제4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그 후로 1972년 제8대, 1978년 제9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독재자라 불릴 만큼의 행보를 보였으며 1979년 10월 26일 서울 궁정동 만찬 석상에서 박정희의 최측근이던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의 권총 피습에 의해 62세로 사망했다. 박정희 피습사건을 10.26 사건이라 불리고 있고, 박정희 사망 후 장례는 국장으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 박정희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들


  • 박정희는 여자 보는 눈이 꽤 높았는데 키가 크고 얼굴이 긴 미인형을 좋아했고 본인처럼 근대교육을 받고 자란 여성과 결혼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실제로 결혼을 전제로 동거했던 이현란과 육영수 여사가 그러한 스타일이다. 첫 번째 부인이었던 김호남은 전통적이며 순종적인 여성이어서 시어머니 마음엔 들었지만 박정희 마음엔 들지 않았다고 한다. 

 

  • 박정희는 교사로 생활하는 것과 아버지의 강요로 하게 된 첫 번째 결혼생활을 맘에 안들어 했다고 한다. 특히나 결혼생활은 너무 불성실한 나머지 형인 박상희에게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 박정희의 첫번째 결혼은 당시 농촌에서 대부분 그러했듯이 나이가 차 집안에서 결혼하라고 하여 억지로 하게된 결혼이었다. 첫번째 부인의 성격은 유순해 박정희의 어머니는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 구미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시절 박정희는 역사수업에서 배운 일본 위인들을 좋아했고 5학년 때 춘원 이광수가 쓴 책 [이순신]을 읽고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6학년 때는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폴레옹을 숭배할 정도로 좋아했고 교사 시절 문경에 있던 하숙집엔 나폴레옹 초상화를 걸어둘 정도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이순신이나 나폴레옹 등과 같은 군인을 좋아했던 것을 보면 필시 교사보단 군인이 될 인물이었던 듯싶다.

 

  • 박정희는 생전 엄청난 골초(애연가)였다.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날 당시 짚차 안에서 줄담배를 피웠고,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당시 인기 드라마였던 '수사반장'을 보며 담배가 나올 때마다 담배를 따라 피웠으며 월남 파병을 결정짓기 전에는 담배를 저녁에만 4갑을 피웠다고 한다.

 

  • 교사를 3년간 할 정도로 받은 교육과 학력이 당시로썬 꽤 높았다. 거기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도 교육을 받기도 해 문예적 소양이 깊었다고 한다. 시, 일기, 편지 같은 글쓰기나 풍금, 트럼펫 등의 악기들도 여럿 잘 다뤘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림과 서예를 취미로 즐겼고, 승마나 검도, 국궁을 즐겨하기도 했다고 한다. 서예 전문가들은 역대 대통령들 중 최고의 명필로 꼽는 게 이승만 서체이고, 가장 값을 비싸게 치는 것은 박정희의 서체라고 한다.

 

  • 의외로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에게 반말을 잘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관, 참모들은 물론이고 청와대 청소부나 이발사들에게도 존댓말을 했다고 한다. 꽤 오랫동안 군인생활을 겪었고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박정희의 위치를 생각해본다면 정말 의외이고, 반말을 했던 사람들은 조카사위인 김종필, 고향 후배 김재규, 친구 김계원(친구이자 당시 육군 참모총장)등 최측근의 사람들이었고 권력실세였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본인의 경호실장을 맡고 있던 차지철에게도 존댓말을 했다고 한다. 참고로 차지철과의 관계는 생각보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고, 박정희와는 철저한 상하 부하 관계였다고 한다.

 

  • 평소 생활에 있어서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나물이나 두부 등의 음식을 좋아했고, 허리띠가 해지면 청와대 전속 이발사가 알려줘야 알아차릴 정도였다고 한다. 여름엔 에어컨도 잘 틀지 않았고 겨울에도 적당한 온도만 유지했으며, 심지어 변기 물을 아끼기 위해 변기에 벽돌까지 넣어두었다는 증언도 있다. 아마도 어릴 적 가난한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그러한 습관들이 몸에 밴 것으로 생각되고 한국 근현대사 관련 학자들이나 정치학자들도 박정희의 평소 생활습관은 검소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 박정희가 평소 친누나처럼 좋아했던 주현숙의 말에 따르면 1939 연말쯤 박정희가 주현숙 집에 놀러 와 "군인이 돼 높은 사람이 돼서 돌아오겠다"라고 하며 일본 군가를 불렀고, 얼마 후 진짜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고 한다.

 

  • 박정희는 6군단 부군단장에서 보직해임을 당해 7사단장으로 부임했는데 보직해임 이유가 부군단장 신분으로 군단장과 싸웠기 때문이다. 당시 6군단장이었던 백인엽 장군은 백선엽 당시 육군 참모총장의 친동생이었는데 친동생인 백인엽과 아끼던 후배 박정희가 싸웠고 누구하나 편을 들 수 없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보직해임으로 둘을 분리시켰다. 군법으로도 그것이 맞는 일이기도 했다.

 

  • 박정희는 당시 "밤의 대통령"이라 불리면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과 꽤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박정희가 첫 대통령 유세를 마친 뒤 방일영의 집으로 가 기생들과 '야스기부시'(미꾸라지 잡기)라는 일본 민속춤을 추며 밤새 놀았고 이 사실이 육영수 여사 귀에 들어가 육영수는 청와대 비서진들에게 박정희가 다시는 방일영의 집에 못가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 유럽 방문 당시, 한자로 서명하려던 걸 본 측근 중 한 사람이 "각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이십니다"라고 하자 즉시 한글 사인으로 바꾸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 후에도 박정희는 한글 서명을 계속 유지했다고 한다.

 

  • 미국을 세 번째 방문한 박정희는 한일수교에서 독도 영유권 문제가 생기자 데이비드 딘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과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미국 기록에 있다. [수교 협상에서 짜증스러운 문제 가운데 하나가 독도문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도를 폭파시켜 없애버리고 싶다 President Park said would like to bomb the island out of existence to resolve the problem]

 

  •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던 당시 박정희가 현장을 지휘하던 정주영 회장을 호출해 만나게 되었는데 정주영 회장이 피곤해서 대통령이 이야기하던 중 잠깐 졸았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정주영 회장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정사장 내가 미안하구려"라며 피곤한 사람을 잡아두었다고 사과했다고 한다. 이와는 별개로 박정희가 조선소 건립을 지시한 적이 있는데 정주영 회장이 기술과 자본문제로 난색을 표하자 "현대가 정 회장 개인 거요?"라며 호통을 친적도 있다고 한다. 

 

  • 스웨터를 수출하는 공장 시찰을 갔을 때 박정희와 이야기를 나누던 어린 여공이 "공부 못한 게 한입니다."라고 말하자 사장과 논의해 야간학교를 세우기로 결정되었다. 고등공민학교, 또는 산업학교라고 불린 교육기관이다. 다만 정식 학교는 아니었기 때문에 문교부에서 수료증은 줬지만 졸업증은 불가하다란 지침을 내리자 다음날 문교부 장관이 청와대에 불려 가게 되었고 이후 관련 규정이 바뀌었다고 한다.

 

  • 청와대 출입기자와 4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하순봉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81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한국 기술로 개발한 핵무기를 공개한 뒤 전격 하야할 생각이었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후계자로는 김종필을 생각해두고 있었다고 한다.

 

 

 

 

  • 이미 많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일제강점기에 사용하던 일본식 이름은 다카기 마사오이다. 박정희가 신경 군관학교에 입교한 그다음 해인 1941년에 바꾼 것으로 보통 다카키라고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다카기 마사오가 일본식 이름이었다. 참고로 구글 검색 결과에도 '다카키 마사오'가 '다카기 마사오'보다 더 많다. 

 

  • 아버지 박성빈 - 박정희 - 아들 박지만 - 손자 박세현 간의 각각 나이 차가 굉장히 심한데 박정희 본인은 박성빈의 막내아들인 이유이기도 하고 아들인 박지만에게 손자 박세현은 장남인데도 나이차가 꽤 심한 편이다. 박성빈과 박정희는 46년 차이고 박정희와 박지만은 41년 차, 박지만과 박세현은 47년 차이다. 

 

  • 박정희의 큰형인 박동희는 66세 때 동생이 정변에 성공해 대통령이 된 뒤에도 고향인 구미면 상모동에서 농부로 살다가 별세했다고 한다. 박동희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박재홍은 백수로 있다가 삼촌이 대통령이 된 다음 포항제철에 취직했고, 이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해 4선 국회의원을 했다. 박정희의 큰 누나 박귀희는 은씨 집안으로 출가했고 3남 2녀를 두었는데 이 3남중 차남인 은희만의 아들이 바로 젝스키스 "은지원"이다. 셋째형 박상희는 거물급 공산주의자였고 이 때문에 박정희도 잡혀가 고문을 당한적이 있다. 박상희의 딸 박영옥은 김종필과 결혼해 김종필은 박정희의 조카사위가 되었다.

 

  • 박정희는 처음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를 듣고 화가 나 최태민을 거세시키고 박근혜 근처에 못 오게 하도록 지시를 내렸지만 얼마 안있어 육영수 여사가 암살당했고 이후엔 "애미 없는 것"이라고 딸을 감싸며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지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중에는 오히려 최태민이 마음에 안드는 도지사나 경찰총장을 호출해 호통치거나 구국십자군이란 단체를 만들어 돈을 갈취하는 국정농단 행위를 방조하기까지 했다. 결국엔 "최태민의 전횡을 방조하던 박정희를 보다 못해 결국 저격하게 되었다."라고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에 적었다.

 

  •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 때 200만여 명의 추모객들이 몰려왔고, 이 기록은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객이 500만 명을 기록해 깨졌다. 

 

  •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 유일한 왼손잡이이다. 다만 대통령 재임 시절 공문처리를 위한 서류 작업 시 오른손으로 했다고 한다. 

 

  • 박정희의 고향인 구미에는 "박정희로"라는 길이 있다.

 

  • 박정희는 성형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외적으로 보이는 것 때문에 한 것이 아니라 축농증의 종류인 부비동염을 앓고 있어서 성형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2번에 걸쳐 성형을 했지만 실패하였고 일본으로 넘어가 수술을 받으면서 증세가 없어졌다고 한다. 

 

  • 70년대 중반 혜화동 로터리 근처 한 막걸릿집에 박정희 혼자 들어가 막걸리 한 사발을 시켜 김치를 곁들여 마셨다는 말이 있다. 조금 후 주인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대통령이 막걸리 독에서 직접 또 한잔을 퍼고 있었고 다 먹고 나서 "얼마냐"라고 묻고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계산하고 나갔다고 한다.

 

  • 박정희는 10월 26일에 사망했는데 42년 후 같은 날 노태우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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