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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한국 역사,근현대사

조선 3번째 왕 "이방원"에 대한 여러가지 사실들(feat.세종아빠)

by 장봉다리 2022.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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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

 

 

 

이방원은 조선의 제3대 왕이자, 4대왕인 세종의 아버지이다. 묘호는 태종. 휘는 방원, 자는 유덕.

아버지인 이성계와 어머니인 신의왕후의 5남으로 태어났고 17세에 과거에 급제해 고려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아버지인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적극적으로 도왔지만, 이후 포은 정몽주를 살해해 아버지에게 제대로 찍히고, 조선 건국 후에는 '정안군'에 책봉되고, 정도전, 심효생, 남은, 과도 갈등을 빚어 왕세자에는 오르지 못했다. 태조 6년인 1398년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을 일으켜 계모인 신덕왕후의 소생이자 조선 건국에 아무 도움이 안 된 이복 막내동생인 왕세자 이방석, 그의 친형인 이방번, 세자를 지지하던 개국공신 정도전과 남은 일파들을 참살하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태조로부터 선위 받아 둘째형인 이방과를 조선의 제2대 국왕인 정종으로 옹립하기도 했다.

 

1400년(정종 2년)에는 태조의 4남이자 친형인 이방간이 차기 왕권다툼을 벌이게 되는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이방간의 세력을 거의 제거한 뒤 이방간을 유배 보냈고 형인 정종에게 적자가 생기지 않자 제3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후 강압적으로 정종에게 양위를 받아 조선의 제3대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즉위 이후 불안정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적들과 외척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는데 자신을 왕으로 올려준 공신들을 숙청해 정치적 질서를 바로 잡은 뒤 자신의 아들인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세종이 외척이나 여러 공신들에 휘둘리지 않고, 참하고 어진 정치를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 줌으로써 세종이 가야 할 길에 방해가 될 요소들을 미리 제거했다는 의견이 많다. 이 때문에 세종이 한국사 역대 왕중 성군으로 꼽힐 수 있었던 여러 이유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태종 이방원에 대한 여러가지 사실들


- 태종 이방원이 왕으로 재임하던 중 메뚜기떼가 창궐한 적이 있었는데, 그중 몇 마리를 잡아오게 한 뒤 제일 큰 메뚜기를 골라 "네놈이 백성들의 곡식을 갉아먹는다니 차라리 내 오장육부나 갉아먹어라!"라고 하면서 메뚜기를 먹어버렸다. 이후 신하들이 깜짝 놀라 빨리 의원을 불러오라 했는데 태종은 멀쩡했고 메뚜기는 사라졌다고 한다. 이런 일화는 야사에 쓰여 있었기 때문에 사실로 보기보다는 태종을 성군으로써 보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런 일화를 쓴 것으로 보인다.

 

- 태종은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코끼리를 길들여 본 왕이다.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가 조선에 오게되었는데 조선인들은 처음 보는 코끼리라는 짐승에 놀라 여기저기서 구경을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전직 공조판서인 이우가 코끼리를 보고 대놓고 놀려대다 침까지 뱉어 화난 코끼리가 그를 밟아 죽였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태종은 코끼리를 죽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일본에서 바친 선물이었기 때문에 외교상 문제가 불거질까 봐 전라도 순천도호부 장도로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코끼리는 섬에 오고 난 후 미역이나 풀등을 거부하고 울기만 하다 뼈와 가죽만 남을 정도로 말라 태종이 1년 만에 유배를 풀라고 했지만 코끼리 특성상 워낙 많이 먹어댔고 결국엔 전국에 돌아가며 사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후 세종이 집권하고 있을 때 관찰사의 상소로 다시 섬 가운데 목장 지역으로 돌아갔고 이후부터 코끼리의 기록은 끊어졌다. 쓰인 기록만 보면 코끼리는 조선에서 식량만 축내던 짐승이었다.

 

- 임금의 모든 행적들을 기록해 실록으로 만드는 사관들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말에서 낙마한뒤 사관들에게 이를 비밀로 하라고 했지만 사관들은 기록했고 거기다 비밀로 하라고 한 말도 기록으로 적어두었다고 한다. 민인생이란 사관은 태종이 "내가 쉬는 편전에 들어오지 말라"라고 했는데 들어갔다가 잡혀갔다고 한다.

 

- 고려가 원나라에게 공녀를 바친것 처럼 조선도 명나라에게 공녀를 바쳤는데, 백성들은 이를 모면하기 위해 딸의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얼굴에 침이나 뜸을 놓고 약을 붙이는 등의 방법을 쓰자 왕명을 거역한다는 이유로 엄벌에 처했으며 가산까지 몰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결국 300명의 공녀 후보 중 44명으로 압축하고 5명을 최종으로 뽑았는데 태종은 대신들에게 공녀 대상자로 선정된 여자들에 대해 "누구는 얼굴이 관음보살 같아 애교가 없네, 누구는 입술이 넓고 이마가 좁네, 그게 인물이냐?"라는 등의 불평을 했다고 한다. 공녀를 바치는 것에 있어 원통함을 느끼고, 혹여나 여자들이 자살시도를 할까 봐 걱정했던 중종과는 정반대였다.

 

- 역대 조선의 왕들중 가장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임금이다. 태종은 카리스마 있는 임금의 대표로 여겨지는데 부왕 못지않게 꽤나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

 

- 조선을 건국한 아버지이자 태조인 이성계보다 임금으로써의 자질은 더 높았다 보여지는 인물이다. 성격이 화통하고 진솔하며 포용력과 카리스마가 있고, 무인 출신이다 보니 정치적인 능력과 감각적 역량이 떨어졌던 이성계와는 다르게 무인 집안 출신이지만 과거에 합격할 만큼 학식이 뛰어났고 훗날 보여준 정치적 영향력까지 보면 누가 봐도 왕의 그릇을 가진 인물이라 볼 수 있다.

 

- 태종이 공신들 및 외척들의 숙청 자행과 왕자의 난등 때문에 많은 사람들 죽였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실제 태종이 죽인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고 한다. 태종은 왕권의 안정을 위해 꼭 없어져야 한다고 판단되는 인물들만 집어 제거했고, 연좌제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던 시대였는데도 제거된 인물의 가족이나 주변 인물들은 어지간하면 건들지 않았다고 한다. 잠재적으로 적이 될 수 있는 외척들만 철저하게 제거했을 뿐 왕권에 크게 위협이 되지 않겠다 싶은 이들은 판단하에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오히려 충분히 제거할만한 명분이 있음에도 별다른 처벌을 하지 않은 적도 많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왕권에 손해가 되지 않을까? 란 생각을 두고 숙청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 태종은 자신이 직접 없애버린 정도전의 명분과 과정, 결과에 비해 사후 진행된 처분도 꽤나 관대하게 처리했는데, 보통 정치적인 숙청을 당한 이들은 역모죄를 적용해 죄를 지은 이의 가문과 명예를 다시는 일어설수 없도록 망가트리고 완전히 매장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정도전에게만 '종친 모해 죄'라는 죄목을 붙여 명예를 뺐었을 뿐 그의 가족인 부인과 자녀들에게는 잠시 노비로 전락해 살게 한 뒤 몇 년 후 복권시켜 이후 정상적으로 벼슬을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후에도 정도전의 후손들은 연좌자의 피해를 받지 않고 보통의 사대부 집안으로 살았고 연산군 시절 정도전의 증손자인 정문형이 정승이 되었을 정도였다. 정문형이 정승을 받을 때도 사림들이 반대를 했었는데 반대한 이유가 정도전의 증손자라서 반대한 것이 아닌 그가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제대로 공적을 세운적이 없어 반대를 했다고 한다.

 

- 부엉이를 엄청 싫어하고 무서워 했다고 한다. 태종 6년 8월 5일 부엉이가 경복궁의 누각과 침전에서 울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며칠 뒤인 8월 13일에는 부엉이가 경복궁 근정전에서 울었고, 다음날인 8월 14일에는 경복궁 침전에서 울었으며, 그다음 날인 15일에는 침전과 근정전에서 울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었다. 8월 18일에는 창덕궁 서쪽 액정에서, 19일에는 전농 시의 제기고에서 부엉이가 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계속해서 부엉이가 나타나자 태종은 굉장히 불안해했다고 한다.  부엉이에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가 된 태종은 여기저기로 이어를 하기도 하고 궁궐 수비대에게 잡귀를 쫓는 방상씨탈을 쓰고 경계를 서도록 했으며 부엉이를 쫓기 위해 한밤중에 궁 전체에 불을 밝히게 명령했다고 한다. 세간에서는 태종이 신덕왕후 강 씨의 원혼이 부엉이로 나타났다고 여겨 부엉이를 무서워했다는 소문도 났었다고 한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부엉이를 정도전의 환생으로 여겨 태종이 질색했다고 묘사되기도 했다.

 

 

 

 

 

- 여성편력이 상당했다고 한다. 즉위 다음달부터 조선왕조실록에 태종의 여성 편력에 분노한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없어 경연청으로 열흘 동안이나 도망가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조선 역대 군주 중 다자녀 1위이다. 슬하에 자식이 무려 12남 17녀(29명)이고 요절해 공식 기록에 포함되지 않은 9명(7남 2녀)까지 합하면 무려 38명이다. 

참고로 2위는 성종 16남 12녀(28명), 3위는 선조 14남 11녀(25명), 4위는 정종 15남 8녀(23명)이다.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에도 후궁을 들였고 간택후궁도 많았지만 궁녀 출신 승은 후궁도 많았다고 한다. 여성편력이 심해 당연히 부부관계가 나빴고 즉위 초기 때부터 원경왕후 민 씨와의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계속되는 싸움에 태종은 침소를 경연하는 곳으로 옮겼고 원경왕후 대신 궐 안의 살림을 대신할 규수를 찾아보라고 명까지 내렸다. 내명부를 지휘하고 다스리는 권한을 원경왕후에게 빼앗겠다는 의미였다. 이에 보통 태종의 결정엔 거의 간섭을 안 하던 형인 상왕 정종마저 나서서 태종에게 "보시게 주상 나는 아들(적자)이 없어도 젊은 날의 정으로 사네. 그런데 주상은 아들도 많으면서 왜 또 장가를 들려하시는가?라고 하며 만류했다고 한다. 결국 정종의 만류로 규수 후궁 간택은 무마되었지만 이후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 간택, 승은 후궁들을 들여 원경왕후와의 사이가 원수지간이 될 정도로 안 좋았지만 의외로 태종과의 사이에서 가장 자식을 많이 낳은 사람이 원경 왕후이다.(4남 4녀)

 

- 외척이나 공신들을 숙청할때와는 달리 일반 백성들에게는 꽤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그 일례로 아이들이 혜정교 거리에서 공에 주상(태종), 효령대군, 충녕대군의 이름을 붙이고 차면서 놀다가 잡혀온 적이 있었다. 일반인 이름도 아닌 왕의 이름을 써붙이고 발로 차며 놀았고 게다가 혜정교는 지금의 광화문 교보문고가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궁하고 꽤 가까웠던 거리에서 놀았던 것이다. 애들이고 뭐고 바로 때려죽여도 이상할 것이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태종은 애들이 뭘 알고 그랬겠느냐? 요사한 말을 처벌하는 법도는 이런 데에 적용하는 거 아니다.라고 직접 그 일을 무마시켰고 다시는 이일에 대해 논하지 말라는 어명으로 뒷말이 나올 여지를 아예 싹을 잘라 버렸다. 

 

또 하나는 시골에서 상경한 '손귀생'이라는 사람이 창덕궁을 봤는데 난생처음 보는 크고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해 멋모르고 들어와 돌아다니다 광 연루에서 붙잡혔다. 순금사에서 곤장 80대를 선고했는데, 곤장 최고형은 100대로 사실상 사형 수준이었는데 80대면 아무리 좋게 봐도 불구 아니면 후유증으로 죽을 수도 있는 정도의 높은 형벌이었다. 하지만 태종은 모르고 한일에 대해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하며 그냥 방면했다고 한다.

 

- 태종은 조선의 역대 군주중 유일하게 과거에서 급제해 관료로 실무를 본 경험이 있는 왕이다. 태종은 이자춘(이성계 아버지, 이방원 친할아버지) 때 원나라에서 귀순해 나름 신진이었던 이성계 가문에서 최초로 나온 과거 급제자였다. 때문에 아버지인 이성계가 태종을 엄청 아꼈다고 한다.

 

- 엄청난 사냥 애호가였다고 한다. 정쟁에서는 참아야 할 일이 있을 땐 몇년이고 참는 등의 자제력을 보이기도 했지만 취미에 있어서는 자제력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사냥. 얼마나 사냥을 좋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는데 "전하께서 사냥을 너무 다니시니 걱정입니다"라고 신하가 말할 정도로 사냥을 좋아했다고 한다. 상왕이 되어서도 사냥을 나가려고 아들인 세종대왕이 살이 너무 쪄 함께 사냥을 나가야겠다고 하면서 세종을 핑계로 사냥을 간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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